42. 시설에 작별을 고하며
천 부회장은 그해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거의 매일 직원들을 상대로 업무를 독려하는 메일을 발송하였고, 협력사들에게는 자재를 구걸하는 메일을 발송하였다. 그는 고객사를 비롯하여 협력사에 대한 방문도 이어갔다. 하지만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지지부진한 자재 대금 지급과 약속 불이행 건수가 증가하면서 그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약속 파기가 거듭되면서 협력업체들의 화는 천정을 뚫었다.
오 상무는 평소처럼 자재 재고 파악을 통하여 필요 사업장에 배정하는 등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마무리 작업을 실행했다. 이미 사표를 낸 상태이지만, 2 개월만 더 근무해 달라는 허 회장의 간청에 따라 마무리 작업을 진행했다.
오 상무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결재서류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기업의 경우 망할 줄 모르다가 졸지에 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망하는 것을 알면서, 심지어 망해가는 것을 보면서 망해간다. 조사기관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는 모르지만, 중소기업의 평균수명은 12.3년, 대기업의 평균수명은 29.1년이라고 한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하나케이시(주)는 30년 이상을 운영하여 왔으니 장수한 셈이다. 그렇게 스스로 위안을 삼으면서도 왜 이렇게 많은 아쉬움이 남는지 모르겠다.
사실 중소기업이 장수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개별기업 간 경쟁에서 시스템 경쟁으로 변화하는 상황을 견디려면 품질경쟁력 제고는 필수이고, 공정개선이나 생산성 향상을 통해 경쟁업체보다 제품원가를 낮추는 노력 등이 요구된다. 그 외 품질제고와 원가절감, 납기준수, 기술개발, 경영후계자 양성 등도 필요하다. 기업도 생명체와 같아서 기초체력 단련 위에 끊임없는 도전과 자기 계발을 통해서만 수명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하나케이시(주)는 자만으로 가득 차서 자멸을 선택했다.
무엇보다 회사의 오너인 허 회장의 자만은 추락의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소인은 가난한 때에는 나약하지만 부유하게 되면 교만해진다'는 말이 있다. 그가 능력 있는 인재들을 영입하고 직원들과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었을 때는 기초가 다져지면서 회사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와 더불어 상품 전체를 전액 달러로 결제받는 수출업체로써 수년에 걸친 환율 상승 등의 외부조건은 더 큰 성장과 함께 엄청난 이익을 누리게 해 주었다. 이때 초심을 잃지 말고 겸손하였다면 40년이 아니라 최소 50년 이상 갈 수 있는 업체이었는데, 그는 승승장구하는 청사진만 펼치면서 교만해진 것이 추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더구나 회사가 어려워진 이후에도 직원들을 중하게 여기지 않아 냉랭한 분위기를 계속 조성시킨 것도 재도약의 걸림돌이 되었다. 또한 학벌을 들먹거리며 직원들을 해외파와 국내파로 나누고, 출신지에 따라 직원들을 차별대우 함으로써 직원 간 위회감을 조성시킨 것도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경영자를 잘 못 선정했다는 것도 큰 원인이다. 기업주인 허 회장이 경영에서 손을 뗀 것도 아니고, 직접 경영를 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회사의 선장 역할을 하는 사람을 잘 못 선택한 것은 큰 패착이었다. 물론 천태운 부회장은 그 나름대로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허 회장이 경영에서 손을 뗐다고 하면서도 자꾸 딴지를 건다고 입이 삐죽 나오는 모습을 오 상무는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외국의 유명한 대학 출신들에게 어떤 콤플렉스가 있는 것인지 그들의 의견을 무시함은 물론이고, 그 역시 국내파와 해외파의 다툼을 조장하며 직원들의 화합을 도모하려고 하지 않았다. 허 회장의 노력 등으로 그렇게 수많은 인재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각자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오상무는 착잡한 마음으로 이렇게 원인들을 짚어 보며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나라가 망하는 것도 그렇지만, 외적인 것보다 내부의 잘못이 크다. 그러면서 지난 6년 4개월을 그려보니 자신도 이 결과에 대하여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애를 쓴다고는 했지만, 수시로 불의에 눈감고, 불공정에 모른 체하며 지냈음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가 이 지경으로 몰린 원인 중 하나는 자신의 비겁함도 한몫했다는 자책으로 착잡하였다.
오 상무는 6년 넘게 근무하며 정이 들었던 회사의 여기저기 시설들을 둘러보다가 대회의실 앞에서 다시 울컥하였다. 특히 부장급 이상의 직원들이 자주 모여 주제발표를 하고, 회사의 청사진을 그리거나 신제품에 대해 토론을 벌이던 정든 회의실을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오 상무가 수시로 환율이나 금리 등 경제 관련 동향을 발표하거나 SWOT 분석으로 추진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자주 들락거리던 회장실과 사장실도 오 상무의 발길을 무겁게 했다.
이제 마지막이라고 여기며 들른 회장실은 그래도 예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회사가 쪼그라들었다고 그 넓은 회장실이 줄어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주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탓인지 온기가 없어 썰렁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청소하는 아줌마가 없어도 비서가 열심히 쓸고 닦은 탓인지 회장실의 방은 더 크게 보였다. 사장실도 마찬가지다. 회사의 현재 상황과 대비된 탓인지 배치되어 있는 가구들은 더 고급스러워 보였다. 오 상무는 자신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그렇게 자주 접했던 시설들과 짧게라고 인사를 나누며 돌았다. 시설과 헤어지는 감정은 사람과 다르게 길거나 높거나 진하지 않다. 말없이 인사를 건넸던 물건들이 떠나는 나를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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