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명순이 아버지 9

헤스톤 2019. 4. 23. 14:51



 

9. 바가지 회상
 

명순이는 나와 같은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나보다 나이가 2살이나 많았다. 따라서 별쭝이가 돼지를

키우던 그해 명순이의 나이는 10살이었다. 10살의 어린 나이 이었지만, 명순이는 산에서 무슨 약초를 캔다

거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은 것과 관련하여 아는 것이 많았다. 나는 명순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산딸기 같은 것을 내 입에 넣어주면 맛있게 먹곤 했다.

명순이는 집에 무슨 일이 많은지 학교를 결석하는 날도 많았다. 명순이는 학교에서 숙제를 검사할 때마다

선생님한테 막대기로 손바닥을 맞곤 했다. 언제나 반에서 모범학생인 나와는 선생님으로부터 받는 대우가

달랐다. 그래도 바로 이웃에 살았던 탓으로 명순이는 나와 자주 어울렸다. 여전히 명순이네의 초가지붕엔 

가을이 되었다고 박들이 탐스럽게 열리고 있었다.

 

신작로에 있는 미루나무 잎들이 자꾸만 떨어지던 늦가을 어느날이었다.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 나와

명순이는 동네에서 좀 멀리 떨어진 산에 갔다. 아주 멀게만 느껴지던 산으로 명순이가 아니면 나 혼자서는

가지 못할 곳이었다. 명순이는 정나미가 뚝 떨어진 집이나 학교와 되도록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칡 몇 개를 캐고 올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명순이는 칡이라는 것을 그 나이에

잘 알고 있었다. 칡을 캐서 씹어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점점 주변은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나는 추웠다. 왠지 겁도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빨리 집에 가자고 졸랐다. 그랬더니 명순이는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고 하면서 나를 꼭 안아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파래진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갖다 댔다. 정말 순식간이었지만, 이상하게 추위가 사라졌다. 

한참을 명순이는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갖다 대고 있었다. 나는 별 느낌없이 가만히 있었다. 추위를 못

느끼게 된 탓인지 싫지는 않았다. 그냥 바가지 물맛이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명순이는 엄청나게 큰 칡을 발견했고, 그 칡을 캔다고 명순이는 나뭇가지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갔다. 빨리 집에 가자고 보채도 명순이는 그 큰 칡을 캐지 않으면 안되는 것

처럼 칡 캐는 것에 열중했다.

그날 밤 매우 늦은 시간에 집에 올 수 있었다. 우리집은 말할 것도 없고, 동네에서는 난리가 났다. 나를

찾는다고 동네 사람들이 가을 밤을 샅샅이 훑으며 다니고 있었다.

명순이는 우리 엄마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모른다. 별쭝이도 동네 사람들한테 많이 혼났고, 밤새도록

명순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많이 피곤했는지 그냥 명순이의 입에서 나던 바가지 냄새와 함께

꿈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그해 설날을 앞둔 추운 겨울이었다.

별쭝이는 읍내 장날에 가서 누구와 술을 먹었는지 정신을 가누지 못할 정도이었다. 아마 그를 인간으로 

상대해 주는 이도 없어서 혼자 그렇게 마셨을 것이다. 정말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닭 키우는 것도 그렇고 돼지 키우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누라가 도망갔다. 

6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팽개치고 못 살겠다고 도망갔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명절을 앞든 대목 장날의 한 공간을 어슬렁거리다가 제수 음식을 사고  있는 

고 부잣집의 허씨 새댁을 보았다. 여전히 아름답다. 비몽사몽간에 자신의 첩으로 착각했다.

"여보 당신 그동안 어디 갔었어? 나야 나! 당신 서방!"

"정신차리세요. 난 당신이 누군지는 알지만, 난 당신 마누라가 아니오."

"내가 당신 찾는다고 얼마나 헤맨지 아오? 언제 여기에 왔소? "

"무슨 소리를 하는게요. 당신이 왜 나를 찾는단 말이오."

별쭝이가 허씨 새댁에게 달려들자 고 부잣집의 하인들이 밀쳐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별쭝이를

밀어내며 한마디씩 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미친 놈이 따로 없군. 별쭝이 이놈이 이제 실성을 한 모양이로구나!"

"이 인간은 장날만 되면 이곳에 와서 개망나니가 되더니 대목에도 왜 나타났는지 모르겠군" 

고 부잣집 식솔들은 별쭝이가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것이 창피해서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별쭝이는 

멀뚱멀뚱 허씨 새댁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그렇게 멀어져가는 고 부잣집 며느리를 쳐다봤다.


 


 

다음 날 초상이 났다고 동네가 어수선했다

별쭝이가 죽었다.

읍내에서 재근마을로 오는 마지막 버스에 별쭝이는 없었고, 겨울 해는 짧았다. 그해 섣달의 한파는

매서웠다. 그날 밤 별쭝이는 읍내에서 집으로 걸어오다가 논바닥에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별쭝이가

얼어 죽었다. 논바닥에서 꽁꽁 얼어 죽었다.

 

그의 친척들이 장사를 지내 주었다. 명순이의 오빠나 언니는 울었지만, 명순이의 동생들은 그저 신났다. 

자기 집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여기저기서 음식냄새가 나니 그저 신났다. 볼품은 없지만, 꽃 상여도

한켠에 있었다. 어린 명순이 동생들은 그 상여에 올라타거나 주위를 돌며 숨바꼭질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집 안방에서 관을 든 사람이 바가지를 깨면서 나왔다. 동네 꼬마들은 상여나가는 풍경을 구경하면서

즐거워 했다. 소리꾼의 상여가(喪輿歌)를 흉내내는 애들도 있었다.

 

어~허~ 어~허~

이제가면 언제오나

어~허~어~허~

북망산천 멀다더니

왜이다지 가까운고

어~허~어~허~

이제가면 언제오나

간다간다 나는 간다

어~허~어~허~

 

누구나 잠시 머물다 가는 인생이지만, 이렇게 술에 취해 꿈에 취해 비틀거리다 별쭝이는 30대 후반의

나이로 갔다. 결국 그는 세상에 태어나 개차반으로 살다가 마흔살도 안 된 나이에 뒷동산의 한줌 흙으로

돌아갔다. 그 뒤 명순이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우리 집도 다음 해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다.(끝)

 

 



 .

약 55년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명순이와 만나기로 한 "김유정 문학관"에 도착했더니 키가 작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줌마가 픽업트럭에서 내려 걸어 옵니다. 예쁘게 생긴 바가지를 몇 개 가지고..

그냥 직감으로 명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올 초부터 쓰기 시작한 "명순이 아버지"라는 소설을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나중에 좀 더 다듬어서 그냥 읽어볼만한 소설로 만들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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