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상회제원비

헤스톤 2017. 5. 13. 18:09


언제부터인가 고향 동네 길가에 세워져 있었던 비석이 없어졌다. "상회제원비(常懷濟原碑)"라는 큰 비석으로

금산읍내에 있는 삼남제약의 김순기 회장님이 세운 것이다. 우선 김순기님은 나의 부친과 매우 가깝게 지내

셨던 분으로 금산군내에서 큰 존경을 받던 분이다. 그는 금산군내에서 제일 큰 부자로 알려졌는데 그가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존경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는 금산군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공익사업을 추진하였고

빈곤층을 위한 장학사업을 비롯하여 수 많은 봉사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여하튼 고향에 갈 때마다 잘 보이던 그 비석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수소문해본 결과 산속으로 옮겼다는 것

이다. 그 분이 돌아가시기전에 자신이 묻힐 산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사실 원래 자리에서 1Km도 안

떨어진 곳으로 옮긴 것인데,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산속이기에 자주 보이던 것이 사라진 것처럼 허전

하고 기분이 저하된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옮겨진 곳이 아늑한 곳이기도 하고 훼손의 위험성도 줄어들은 것

같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상회제원비에는 "世界同家(세계동가) 人類同胞(인류동포) 濟原同氣(제원동기)"라고 쓰여있다. 3同 정신이라

고도 하는데 한자 그대로 그냥 풀어보면 세계가 같은 가정이나 가족이고, 인류 모두가 동포로 한 민족의 사람

들이며, 제원 사람들은 다 형제나 자매같은 동기라는 말이다. 제원은 내 고향 충남 금산의 제원(濟原)을

말하는 것이다. 



(위의 사진은 현재의 위치에 있는 '상회제원비'이고 아래 사진은 나의 부친이 쓴 '상회제원비 찬가'의 표지이다.)


그나저나 저 크고 무거운 돌을 길도 좁은 이 산속으로 어떻게 옮겼을까? 세상에 불가사의한 일도 많은데 이런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을지도 모른다.  


아래 사진처럼 나의 고조부의 행적비도 잘 옮겨져 있다. 진충우국지사(盡忠憂國志士) 박항래(朴恒來)공은

민중들을 사랑하고 후학양성에도 힘을 쏟으셨다. 나의 고조부이기 때문에 좋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서민들을 사랑했기에 동네에서 많은 존경을 받은 것 같다. 어느덧 160년이상 전에 태어나셨고, 이제 돌아가신

지도 80년 이상이 지났다.  



다른 분들의 문학비와 함께 나의 아버지 박종기(朴鍾琦)시인의 시비도 조그맣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내가 상회제원비를 보며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돈"이다. 고향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며 자긍심을

갖고 살으신 건립한 이의 높은 뜻보다 "돈"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뜻과 철학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남기겠다는 여유도 없이 먹고 살기 바쁠 뿐이라면 이런 비석을 세울 엄두도 못낼 것이다. 또한 이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후세의 사람들이 얼마나 기억할지 모른다. 

솔직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서도 나의 아버지는커녕 고조부의 이름을 들어본 자도 거의 없을 것이고 김순기

님에 대한 생애를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물론 고향에서는 유명하신 분으로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잘 알겠

지만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겠는가. 

간혹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내가 죽은 후 나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며, 얼마나 오래 기억될 수

있을까? 내가 쓴 졸시나 수필 중 어느 한 줄이라도 오래 남을 수 있을까?  솔직히 나도 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한줄기 흔적은 남기고 싶지만 어찌될지는 모른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름을 남기지 못할지라도 더럽게 살지는 말자. 언제나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다가 깨끗하게 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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