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상)편에 이어 中(중)편을 계속 이어 쓴다.
상편 말미에 잠깐 언급을 하였지만, 전문적인 용어가 나오는 글은 자칫 너무 딱딱하여 읽는 재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초서라는 글씨처럼 유연성을 가미하여 쓰고자 하는데, 초서 역시 서체의 하나인 탓으로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상편에서 서술한 장초와 금초에 이어 광초와 관련된 것부터 시작한다.
광초는 당 장욱에서 비롯된 것으로 위진시대 이래 왕희지의 전통적인 초서필법에서 벗어나 술이나 자연계의 현상으로부터 정서나 영감을 불러일으켜 광사(狂肆)하게 썼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당 회소(懷素)가 개성적인 광초서풍을 이루었다. 광초의 대표적인 예로는 장욱의 "자언첩 自言帖"과 회소의 "자서첩 自敍帖"이 있다. 초서를 말할 때 자주 언급되는 회소(懷素, 737-799)는 자(字)가 장진(藏眞)으로, 영주(永州) 영릉(零陵) 출신이다. 당(唐)의 승려이자 서예가로 광초(狂草)를 잘 쓰기로 유명하였다. 이름 그대로 狂(광)은 미칠 광으로 술과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 같은 경우 초서에 입문하면서 그의 글씨를 임서하곤 했기에 회소에 대하여 조금만 더 부연해 보고자 한다.
회소는 집이 가난해서 종이를 구할 수 없었으므로 파초를 많이 심어서 그 잎을 종이로 대신했고, 잎이 다하면 옻칠을 한 판자에 손가락으로 연습을 했는데 닳고 닳아 구멍이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초서를 즐겨 전적으로 익혔는데 닳은 붓이 잔뜩 쌓여 산기슭에 묻어 붓무덤을 만들었다. 정진 30년에 일가를 이루었으니 참으로 서예를 배우는 사람의 모범이라고 하겠다.
기록에 의하면 회소의 필세(筆勢)는 종횡으로 치달았으며 모습은 건장하면서도 유연하며 자유분방하였다. 이로 인해 어지럽지만 순박한 형상으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회소는 자유분방하고 거침이 없어 자잘한 것에 얽매이지 않았고 일체의 인연에 모두 얽매이면서도 마음으로는 편안하였다. 이에 술을 마셔 천성을 양성하고 초서(草書)를 써서 뜻을 드날렸으며, 매번 술이 취하여 흥분할 때면, 절의 벽이나 마을의 담장, 옷과 그릇에 글씨를 쓰지 않은 것이 없기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취승(醉僧)'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한편, 오늘날 흔히 쓰고 있는 금초에 관련된 용어로 독초(獨草)와 연면초(連綿草)가 있다. 전자는 글자마다 필획이 단독으로 떨어진 것을 말하며 후자는 여러 글자의 필획이 서로 이어진 것을 말한다.
또, 반초(半草)와 전초(全草)가 있는데, 전자는 행서와 초서 사이 정도로 왕헌지가 이에 뛰어났다고 하며, 행서와 초서를 섞어 쓴 행초(行草)와 혼용되기도 한다. 후자는 상대적으로 모두 초서로 쓴 것을 이른다. 간혹 서예전시회 등에 가보면 행서와 초서를 섞은 행초의 작품들이 의외로 많음을 알 수 있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 이유는 초서 혹은 행서 글씨만으로는 글자의 대소, 장단, 강약 등의 균형미나 예술성을 높이는 것이 용이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한, 대초(大草)와 소초(小草)가 있는데, 전자는 자형이 크고 필획이 매우 간단한 것으로 광초에 가깝다고 하겠으며, 후자는 비교적 자형이 작고 필획이 단정하여 알아보기 쉬운 것을 말한다. 이 밖에 유사초(遊絲草)라 하여 필획이 실처럼 가늘고 실테처럼 이어지는 유희적 글씨도 있는데 송 오열(吳說)이 유명하다.
참고로 초서는 필사의 속도, 먹의 활삽(滑澀), 자형의 크기, 필획의 곡직(曲直), 점획의 태세(太細), 짜임의 소밀(疎密) 등의 변화가 오체(五體) 중 가장 심하고 다양하여 작가에 따라 개성이 잘 드러난다. 더욱이 작품용으로 의식하지 않고 쓴 편지나 문고(文稿)류 등에서 오히려 그 진면목을 살필 수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는 한자의 전래와 함께 중국의 서법이 들어왔으나 초서 발달의 초기 과정을 보여 주는 유물은 없다. 이후의 초서 진적은 고려까지 수종에 불과하며, 더욱이 금석문에서는 초서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 까닭에 전하는 예가 없어 서예사 서술의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단지, 삼국 말기부터 고려까지에 걸쳐 행서로 된 금석문 중에서 왕희지풍이 주류를 이루고 그 품격도 높았음을 볼 때 초서도 왕풍(王風)을 근간으로 유행되었으리라 추측된다. 또한, 고려 말 조선 초에 유행한 조맹부체 역시 왕희지체를 전형으로 삼은 것이므로 크게는 왕희지체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겠다.
이후 서적(書蹟)이 그나마 남아 있는 조선 초기와 중기의 초서로 이름난 최흥효(崔興孝)·이용(李瑢)·김구(金絿)·이황(李滉)·황기로(黃耆老)·양사언(楊士彦)·한호(韓濩) 등도 대략 왕희지풍의 전통적 초서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최흥효와 이용은 조맹부체의 영향이 배어 있으며, 이황은 단아하고 기품 있는 독초를, 황기로는 회소풍을, 양사언은 활달하고 연면성이 강한 초서풍을 각각 이루었다. 후기를 대표하는 윤순(尹淳)은 청아한 미불풍을, 신위(申緯)는 단정한 동기창풍을 이루는 등 다양한 초서가 나타났지만, 저변을 이루는 초서풍은 역시 진대(晉代)의 전통적인 초서였다.
이후 18세기 후반에 중국으로부터 비학(碑學)의 전래로 전서와 예서에 대한 관심이 쏠리면서 초서의 예술성이 상대적으로 위축된 감은 없지 않으나, 여전히 일상생활에서 초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근래에 들어와 한글 교육과 필사도구의 발달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한자교육이 점점 퇴보되고 한문을 이해하는 계층이 엷어짐에 따라, 초서는 생활에서 멀어지고 어렵게 느껴졌으며, 단지 예술 분야에서 서예가들의 창작대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점점 한자를 아는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큰 원인이겠지만, 한자를 웬만큼 안다고 하더라도 초서를 알아보는 이가 드문 것이 현실이다.
중편도 상편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인물들이 많은 탓으로 글의 딱딱함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이에 하편에서는 사전적 지식 내용을 최대한 축소하고, 나 자신의 느낌 위주로 쓰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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