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초서(草書)에 대하여 (하)

헤스톤 2025. 1. 18. 05:13

 

(소나무 그림에 화제를 초서로 쓴 나의 작품)

 

초서를 문학으로 비유하면 시(詩)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짧은 문장으로 많은 것을 함축하여 표현하는 시처럼 초서도 간결한 획으로 여러 글자를 표현한다. 시의 경우 수필이나 소설과 다르게 정제된 함축과 간결함 속에서 노래나 그림으로 표현이 되듯이 초서도 비슷하다. 그런 이유로 초서가 한시(漢詩)를 만났을 때의 미적 가치는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함축된 언어인 시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듯이, 초서도 점획이 생략되어 절제된 감성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 다른 체에 비하여 어렵다. 글자란 당연히 남이 쓴 것을 흉내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왜 이렇게 쓰는 것인지 알고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취운 진학종 선생은 우리나라 초서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말하길 “서체 중에서 초서가 가장 어렵다, 그만큼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면서 "중국이나 일본 등 한자문화권에서는 초서가 예술적 가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글씨로 평가받고 있다.”고 하였다. 오체 모두 각각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지만, 예술성만 놓고 볼 때는 초서가 가장 으뜸이다. 

 

나는 초서에 입문시 여러 서예가들의 초서 글씨를 맛보면서 희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몇 글자만 맛본 초서들은 왕희지의 십칠첩(十七帖), 지영(智永)의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 손과정(孫過庭)의 서보(書譜), 공해(空海)의 반야경개제, 회소(懷素)의 천금첩 등이다. 위의 인물 중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지영(智永)은 스님으로 왕희지의 7세손이라고 한다. 그 역시 왕희지처럼 해, 행, 초, 장초 등 각체에 능숙하였는데, 초서를 가장 뛰어나게 잘했다고 한다. 그리고 공해(空海)는 일본의 승려로 일본에서는 서성(書聖)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공해의 반야경개제)

 

초서의 가장 큰 단점으로는 가독성(可讀性)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글씨를 쓴 본인도 무슨 글자를 썼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왕의 칙명이나 공문서가 초서로 작성되지는 않았다. 공문서는 대부분 행서로 쓰였다. 행서는 해서에 비해 쓰기는 훨씬 쉬우면서도 가독성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문서 등 실용 문서를 작성하는 데는 행서가 많이 사용되었고, 해서는 영구적으로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문서 위주로 쓰였다.

따라서 공문서에서는 초서를 보기 힘들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작성된 문서는 초서로 쓰인 경우가 많다. 선비들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을 때는 주로 초서로 썼다고 한다. 양반들이 인편으로 하인에게 편지 심부름을 시키는데, 혹여 하인이 그 내용을 알게 될까 봐, 알아볼 수 없도록 초서로 흘려 써서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빠르게 휘갈겨 쓴 초서는 실제 붓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원래의 글자를 추정해야 할 정도로 매우 복잡하다. 또한 서예가 중에서도 초서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는 서예가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문장 전체가 아닌 글자 하나하나를 초서로 쓰는 것에 그치거나, 기존 작품을 베끼는 것이 전부인 경우가 허다하다. 
즉, 초서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한자라는 문자와 초서라는 필체는 물론이고, 한문의 다양한 문맥이 머리에 들어 있을 정도로 한문에 대단히 익숙한 사람이어야 한다. 한문에 대해서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초서를 읽고 쓰는 것을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본다. 즉, 한자를 좀 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쓴 것을 쉽게 읽을 수 있는 서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중에 여러 초서 사전이 있고, 또 일정한 규칙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연마를 하다 보면 어느 정도는 익숙해질 수 있다고 본다. 

행서와 비교시 기본 법칙과 형태로 간략하게 쓴 것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한 번 더 간략화한 것으로 형태에 대한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에 해독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또한 글자 형태가 매우 단순화되어 있기 때문에 자칫 다른 글자로 해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앞뒤 문맥과 글자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필요한 서체이다.

 

간단한 획 하나로도 여러 글자를 표현하는 등 너무 어려운 탓으로 초서를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술성이 가장 높다, 따라서 초서는 서예의 끝이라고 본다. 속도는 빨라야 하고 선은 아름다워야 한다. 선이 아름답고 예술성이 높은 이유 등으로 나는 초서를 사랑한다.

 

(내가 그린 석란도로 화제는 초서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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