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비겁에 대하여

헤스톤 2024. 3. 31. 11:51

 

 

나는 오래전부터 "悲慾(비욕)"이라는 제목으로 장편 소설 하나를 쓰고 있다.

 

은행을 퇴직한 후, 2011년 초부터 2019년 초까지 어느 전자부품 제조업체를 다녔는데, 그 기간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약 8년이란 기간에서 퇴직과 재입사를 몇 번 반복하여 중간에 다니지 않은 기간은 약 1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감안할 때 그 회사에서 근무한 기간은 약 7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실 그 회사가 2015년 가을에 부실화되어 관리업체가 되었고, 2016년 가을 이후에는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 출근하였기 때문에 소설의 바탕이 되는 기간은 2011년 초부터 약 4년간의 생활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기간 동안에 회사가 어떤 사유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어떻게 도산되었는가에 대하여 주인공인 "오제원"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그려 나가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상상을 많이 가미한 픽션으로 등장인물도 가상이다. 누구를 모델로 삼은 것은 당연히 있지만, 그 모델의 성격이나 선악도 그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즉, 인물에 대하여 각색이라는 절차를 거쳤다. 내가 이렇게 픽션이라고 늘어놓는 것은 등장인물로 나오는 아무개가 자신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며, 혹시 시비라도 걸을 까봐 이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웃음이 나온다. "이렇게까지 픽션이라고 주장을 꼭 해야 되나?"라고 되뇌면서 "나 자신이 참 비겁하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비겁"이라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고 겁이 많다는 것으로 안 좋은 이미지가 있는 용어이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살면서 비겁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고 본다. 누구나 얼마큼의 세월을 살면서 비겁이라는 길을 밟지 않고 인생길을 걸은 자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은 언제나 바르다고 말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거의 대부분 비겁이라는 것도 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비겁은 감추면서 남의 비겁이 겉으로 나타나면 욕을 퍼붓는 것이 대부분의 인간들 속성이다.   

 

어느 조직이나 사람사이에는 계급이란 것이 존재한다. 계급은 군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 회사같은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이나 공무원 사회에서도 존재한다. 또한 계급이란 권력이나 부의 여부와 국한된 것만도 아니다. 어느 누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매력도 계급을 만든다. 즉, 보통 사람에게 어필이 되는 매력도 계급이라는 것을 형성한다. 어느 분야의 뛰어난 능력을 보유하고 있거나 미모를 비롯한 신체적 우월함 등이 보통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계급이라는 것이 형성되는 것이다. 

 

"비욕"이란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천태운(직위는 상무에서 전무를 거쳐 사장 역임)은 분명 여러 매력적인 면모를 소유한 인물이다. 소설 진행상 권모술수에 능한 악인으로 등장하지만, 그는 언어 구사 능력이나 윗사람을 다루는 탁월한 능력 등으로 기업주인 허방진 회장보다도 더 큰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권력을 악용함으로써 수많은 비겁자들을 만들었고, 주인공인 오제원도 그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비겁자들을 만들면서 회사는 내리막길을 급속도로 달리게 된 것이다.  

 

 

 

 

"비겁하다 욕하지마"라는 가사가 들어있는 "내 생에 봄날은"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비린내 나는 부둣가를

내 세상처럼 누벼가며

두 주먹으로 또 하루를 

겁 없이 살아간다

희망도 없고 꿈도 없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기막힌 세상 돌아보며

이 서러움에 눈물이 나

비겁하다 욕하지마

 

중략

 

이 세상 어딜 둘러봐도

언제나 나는 혼자였고

시린 고독과 악수하며

외길을 걸어왔다

멋진 남자로 살고 싶어

안간힘으로 버텼는데

막다른 길에 가로막혀

비참하게 부서졌다

비겁하다 욕하지마

 

중 략

 

촛불처럼 짧은 사랑

내 한 몸 아낌없이 바치려 했건만

저 하늘이 외면하는

그 순간 내 생에 봄날은 간다

 

 

일반 사람들은 강한 것에 대하여는 두려움과 비겁의 옷을 입는다. 자신의 약함을 가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강함에 깊이 매료되기도 한다. 우선 자신보다 강하다고 여겨지면 함부로 대할 수가 없게 되고, 머릿속으로 여러 계산을 하게 된다.  그리고 비록 공포에 가까울지라도 자신을 그 위치로 올려보곤 한다. 즉, 강한 것을 좋아하고 인정함으로써 자기도 같은 부류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반대로 자기보다 약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경우도 많은 데, 이것도 일종의 비겁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본다. 

 

비겁해지지 말자. 기온은 아직 차갑지만 3월도 안녕을 고하려는 지금, 甲辰(갑진)년 봄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봄날을 비겁 속에서 보낼 순 없다. 올해의 따뜻한 봄날을 허송세월로 보내고 싶지 않다. 떳떳한 숨을 쉬며 詩(시), 書(서), 畵(화)에서 좋은 작품 하나라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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