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불안한 연상 릴레이

헤스톤 2020. 6. 24. 14:50

 

불안하다. 솔직히 많이 불안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던 오 선생님에게 전화를 몇 번 걸었지만, 계속 "없는 번호"라고 나온다. 알고 있는 집 전화번호도 마찬가지다. "없는 번호이니 다시 확인하라"는 멘트만 계속 듣기 싫게 나온다. 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약 10년 전부터 매년 '스승의 날'이 오면 선생님에게 안부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올해는 어찌하다 그날을 놓치고 늦게서야 전화를 드렸는데, "없는 번호"라는 멘트가 나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다. 

선생님과 연락을 주고받은 지는 이제 약 10년이 조금 넘는다. 당시 선생님은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마누라가 아파서 C대학교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전화이었다. 사모님의 오래전 모습을 그리며 반가움 반, 슬픔 반으로 병문안을 갔었다. 그 후 사모님이 병원 근처 요양원으로 옮기셨다고 해서 그곳에도 갔었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모님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리고 그 후는 소원하게 지내며, 1년에 한 번 "스승의 날"에만 전화 1통을 올리는 것으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매년 전화 속에서 선생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 좋았는데, 지금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답답한 마음에 선생님이 살았다는 아파트 관리사무소로 전화를 했지만, 그런 사람 자체가 없다는 회신만 받았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알지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나를 아껴 주셨던 선생님에 대한 불안함은 나를 매우 싫어했던 초등학교 2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시 학년 초에 있었던 일로 아직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3월 중순쯤으로 기억된다. 학교를 일찍 들어가는 바람에 내 나이 만으로는 아직 6살 때이다. 신체검사를 실시하였다. 당시 시골에서 겨울에 목욕 한번 하려면 할머니나 어머니가 큰 맘먹고 물을 끓여 부엌에서 때를 벗겨주던 시절이었다. 겨우내 목욕 한번 안 하고 지낸 탓으로 시커먼 때가 여기저기 있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직 두꺼운 옷이 더 어울리는 계절에 교실에서 우리는 남녀 가릴 것 없이 팬티만 입고 신체검사를 받았다. 사실 신체검사라기보다는 청결 여부 검사다. 5~6명의 학생만 제외하고는 모두 불합격이었다.

선생님한테 흠씬 두들겨 맞았다. 종아리나 손바닥을 맞은 것이 아니고, 벌거벗은 몸의 배나 등, 허벅지 등을 마구 맞았다. 몸에 때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맞았다. 당시 선생님들은 왜 그렇게 학생을 때렸는지 모른다. 무슨 일만 있으면 열심히 때렸고, 학생들은 열심히 맞았다. 합격한 5~6명의 학생들은 대부분 선생님과 같은 마을에 사는 학생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같은 마을에 사는 애들에게만 미리 정보를 주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물론 순전히 나의 추측이다.

다음날 다시 신체검사를 하였다. 몸 씻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간 대부분의 학생들은 또 맞았다. 나도 배와 등에 자국이 크게 나도록 맞았다. 선생님은 앞으로도 매일 신체검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다시 맞지 않으려고 그날은 엄마에게 목욕시켜달라고 하여 깨끗한 몸으로 다음날 학교에 갔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신체검사를 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했다.

"너희같이 몸에 때가 있는 놈들을 상대로 계속 신체검사할 필요가 없다. 신체검사는 나중에 실시하겠다. 대신 오늘은 머리 검사만 하겠다"

기분이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좀 길은 내 머리를 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날도 나는 실컷 두들겨 맞았다. 사람은 아무리 어려도, 설사 아기라도 누가 자신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쯤은 다 안다. 그 선생님은 나를 무척 싫어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는 가장 안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선생님이다.

그 선생님은 어느 날 모형 시계를 갖고 시간을 볼 줄 아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 반에서 시간을 볼 줄 아는 학생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선생님이 문제를 내면 딱딱 맞췄다. 선생님은 기분이 나쁜지 나를 나오라고 하더니 막 때리는 것이었다. 나는 왜 맞는지도 몰랐다, 그냥 때리니까 맞았다. 당시 그 선생님의 눈초리가 생각난다. 나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던 그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마 이미 먼길을 떠나셨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떄의 많은 선생님들이 이미 고인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연상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로 이어진다. 

약 13년 전 산에 단풍이 곱게 물들었던 가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보다 먼저 하늘로 가신 아버지 형제들도 할 말이 많은지 비가 내렸다. 하늘은 안 보이고 한(恨)만 가득 쌓인 듯했다. 그러더니 발인하는 날은 햇빛이 곱게 쏟아졌다.

내 아들녀석이 영정사진을 들고 앞장섰다. 나는 아버지 유골함을 가슴에 품고 아버지 생전에 세워 놓은 비석 밑에 유골함을 안치하러 갔을 때다.

이때 어디서 쟁반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래고래 소리치는 동네 아낙네가 눈물로 얼룩진 흐릿한 시야에서 어렴풋이 보였다. 이 아낙은 왜 자기 마을 앞으로 유골함이 갔느냐는 것이다. 길이 있는데 그럼 어디로 간단 말인가. 천하에 이런 못된 것이 있을까 하여 한바탕 할까 하다가 온화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고 참았다. 아마 그 여자를 용서하라는 뜻이었을까. 정말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가 이 고장에서 면장을 11년이나 했고. 특히 이 마을은 다른 마을보다 더 애정을 쏟았던 곳인데, 무엇을 알지도 못하고 소리치는 그 여자가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한참 일그러진 그 여자의 얼굴을 보니 왠지 이상한 감이 들었다. 솔직히 내가 무슨 관상을 볼 줄 알겠느냐만 "돈독"이라고 쓰여있는 그녀의 몰골은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뒤 그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고싶지도 않았기에 알지 못한다.

아마 죽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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