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悲慾(비욕) - 20

헤스톤 2024. 2. 24. 15:56

 

 

 

20. 헝클어진 머리 

 

 

오 이사는 회사의 앞날을 그려보며 착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회의 때마다 주장하는 것 중의 하나는 "get back to the basics"이었다. 현재의 상태로 가면 회사가 얼마 못 가 망하는 것은 뻔하기 때문에 기본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그렇지 못하면 남아있는 자들도 결국 모두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자고 임원 회의 때마다 말하곤 하였다. 우선 오 이사는 자신이 맡고 있는 구매부문부터 자세를 바르게 하도록 하였다. 약 80여 개에 이르는 자재공급 업체들에 대하여 오 이사는 원가분석을 하였다. 그러한 원가절감 노력과 부하 직원들의 헌신으로 구매부문은 그해 약 120억원의 원가절감을 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오 이사는 고생한 구매부문 직원들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승진 혹은 특별승급을 비롯한 어느 정도의 보상을 기대하고, 성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경영자인 허 회장과 실세인 천 전무 등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들은 보고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분을 상하게 하는 엉뚱한 소리만 들렸다. 오 이사의 체계적인 분석과 부하 직원들의 노력을 폄하하고 다니는 그들을 보면서 자괴감이 들었다. 대체 자재 발굴과 협력업체들의 손목을 비틀면서 약 12억원의 원가절가이라는 높은 실적을 올렸음에도 성과에 대한 보상은커녕 상황파악을 못한다는 비난의 소리만 들려오곤 하였기 때문이다.

 

 

 

이유는 한가지였다. 영업에서 자재가격 인하 이상으로 고객사들에게 제품 가격을 할인해 줬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볼 때 회사가 적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즉, 적자가 난 마당에 무슨 상을 주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도 잘한 것은 잘했다고 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한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고 오 이사는 생각했다. 허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의 그릇 크기에 의심이 들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천 전무의 폄훼성 발언이었다. 구매 부문엔 애사심이나 희생정신을 가진 직원이 없다는 식의 말들만 들려왔다. 오 이사나 구매 부문 직원들의 기분을 상하게 함은 물론이고,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게 하였다. 

 

회사가 어려워진 근본 이유는 생산 부문의 잘못된 접기 기술로 불량품이 나온 것이 주원인이고, 영업부문에서 가격협상을 잘못하여 전년대비 약 00억원의 손실을 입은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에 대하여 적절한 벌도 없었다. 적정한 상벌이 없다는 것은 회사의 기강이 없다는 것과 같다. 말로만 열심히 일하라는 것은 일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과에 대하여 적정한 보상도 없고, 잘못한 것에 대한 적정한 벌도 없다는 것은 열심히 일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잘못한 것에 대하여 적정한 벌이 없다는 것은 계속해서 잘못을 저질러도 괜찮다는 것과 같다.  

 

오 이사는 착잡한 마음으로 회사가 오래 전 공들여서 조성해 놓은 정원(庭園)을 걸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잔뜩 흐린 날씨이더니 이내 쏟아지기 시작한다. 정원과 가까운 제 2연구실 쪽의 가까운 건물 안으로 피해서 굵은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번개가 무섭게 달려들더니 천둥소리가 요란하다. 구매부문 직원들을 어떻게 달래며 다시 신발끈을 매도록 할까를 고민하며 갑자기 쏟아지는 비만 바라보고 있는데, 저 멀리 주차장 쪽에서 많이 보던 사람이 뛰어 온다. 제품의 말단에 부착하는 콘덴서를 납품하는 P사의 H 사장이다. 비 예보가 없었던 날로 우산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탓으로 잠깐 동안에 흠뻑 젖었다. 오 이사를 보더니 빗속에서 허리를 90도로 꺾는다. 그리고 다가오는 그를 오 이사는 빨리 갈 길을 가라고 손짓했다. 

 

비가 어느 정도 그친 다음 구매부문 사무실로 들어오니 H 사장은 구매의 현 과장에게 읍소를 하고 있었다. 그 업체는 3개월 전에 납품한 물품대금도 아직 받지를 못해 사정을 하러 온 것이다. 규모가 작은 영세업체로 부도 직전이라며 울먹거린다. 회사의 자금 사정으로 정상 결제를 해주지 못하는 구매담당으로 오 이사는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밨에 없었다. 언제 지급해 줄 수 있을지 확답도 할 수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오 이사는 H 사장을 CFO인 천 전무와 만나게 해 주었다. 천 전무는 인상을 찌푸린다. 오 이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전무님, 지금  P사의 상황이 매우 심각하니 어떻게 한달치만이라도 줄 수 없겠습니까?"

"어렵습니다. 지금 상황으로는 이 달 직원 월급도 지연될 것 같습니다."

H 사장은 울상이 되어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조아린다.

"전무님이 지난 달에 저에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적어도 1개월 이내로 미수금 모두를 해결해 주겠다고 하시고는 이제 와서 그러면 어떡합니까?" 

"아시다시피 불경기가 계속되고 있고, 우리도 받을 돈을 제 때 받지 못해 그런 것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H 사장의 그 불쌍한 표정을 오 이사는 더 보기가 민망하였다. 

채권자이면서도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H 사장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오 이사는 자기 책상으로 돌아와 비겁한 자신의 모습을 노트에 끄적거렸다. 

 

 

 

비 오는 날의 허탕

 

1.

헝클어져
 
헝클어져라 머리칼마다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검푸른 원망들은
 
와이셔츠로 스며들며 진득거려라
 

올올히 진득거리는 내 안에 원망들
 
분노의 폭탄으로 회오리쳐
 
땀에 절인 가방 초조히 만지작거려라
 

그러나
 
乙이 된 죄로 비굴을 꼬옥 품어 안고 무릎 꿇어라

 
 
2.
 

법의 잣대로 흔들어 봐라
 
읍소하라 매달려라

그러나

甲은 수금을 못하고 있는 또 누구의 乙이 되어
 
빈손으로 허공만 바라보네

 

구름이 몰려와서 천둥 치면 풀린다더니
 
장마가 시작되면 흠뻑 적시게 해준다더니
 

‘에이, 저 면상에 침이라도 뱉어 버려?’
 

그러나
 
이 몸은 저 자세로 고개 숙여라
 
납품하고 사정하는 乙임을 명심하여라


오늘도
 
쏟아지는 빗속
 
젖은 몸으로 터덜터덜 흔들려가는 내 그림자여
 
 
 

 

'장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悲慾(비욕) - 22  (4) 2024.04.25
悲慾(비욕) - 21  (2) 2024.03.11
悲慾(비욕) - 19  (24) 2024.01.26
悲慾(비욕) - 18  (14) 2024.01.04
悲慾(비욕) - 17  (11) 2023.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