悲慾(비욕) - 35
35. 갱생가능 없음
우선 사업장의 생산직 직원을 제외한 사무직원을 대상으로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총무 및 자금, 미래전략, 영업, 생산관리, 구매, 품질 등 총 6개 부문으로 이루어진 조직에서 각 부문당 3분의 1에 해당하는 직원을 정리 해고 시키기로 했다. 일률적으로 3분의 1을 해고시키는 것에 대하여 임원 회의에서 오 상무는 부당함을 내세웠다. 현재 직원수로 볼 때 영업은 구매보다 약 6배가 많고, 생산관리는 약 4배가 많은데, 각 부문당 똑같이 3분의 1을 줄이면 직원수가 적은 쪽에서는 남아 있는 직원의 업무 가중이 상대적으로 크게 높아져 운영에 큰 차질을 가져오니 고려해 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다른 부문장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 상무는 부문 직원 명단을 보며 약 이틀을 고민했다.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회사 방침을 설명하고 일대일로 면담을 한 이후 해고 대상을 통보했다. 특기할만한 것으로는 천 부회장이 김명혜 대리와 정수미 대리를 대상에 포함시키라고 압력을 가했지만, 오 상무는 그녀들을 제외시켰다는 것이다.
또 특기할만한 것으로는 부문장 2 명이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천 부회장과 자주 대립각을 세우던 영업부문장 박호진 상무와 지난번 공장에서 다툼이 았었던 생산부문장 한대교 이사이다. 오 상무가 입사하던 해 16명이던 임원은 어느덧 그 절반인 8명으로 줄어 있었다. 왠지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들을 자꾸만 내보내는 듯하여, 떠나는 그들을 보며 오 상무는 쓸쓸하였다.
매번 있었던 구조조정에서도 그랬었지만, 이번에도 문제는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이 많이 해고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회사는 더 삐걱거리게 되었다. 실력이 좋은 직원들이 많이 나간 후, 포장지만 좋고 내용은 부실한, 즉 학벌만 좋고 실력은 형편없는 그런 직원들의 잘못된 지식들이 각종 작업에 문제를 발생시키곤 했다. 인사가 만사인데, 공정과 상식에서 벗어난 인사와 천 부회장의 잘못된 경영은 회사를 추락의 길로 내달리게 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지만, 중소기업은 1년은커녕 6개월 버티기도 힘들다. 오 상무는 미래를 그려 보며 착잡하였다. 남아 있는 직원들은 앞으로 퇴직금은 물론이고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난번 구조조정에서 약간의 보상을 받고 나간 직원들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 상무는 착잡하였다. 착잡할 때마다 가는 구내식당 근처에 있는 연못으로 갔다. 식당 앞에는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는지 생산직 직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올해 작업복을 다시 해주지 않은 탓도 았지만, 옷들이 왜 이렇게 꾀죄죄한지 꼭 회사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봄비가 끈질기게 내리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 속에서 바라본 그곳은 아름다운 꽃이 피고 연둣빛 어린잎들이 고개를 내미는 계절과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기분 탓인지 봄이라고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쌀쌀한 탓인지 아니면 물고기는 모두 출장을 보냈는지 한 마리도 없었다. 식당은 수용소를 연상시켰다. 원망과 체념의 눈초리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때 잘 나가던 회사가 왜 이 모양이 되었는지 심란하다. 무엇보다 갱생의지는 한 톨도 찾아보기 힘들고, 갱생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빨리 문 닫고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만 높아졌다. 지금 이대로의 결론은 "갱생가능 없음"이라고 판단했다. 시(詩)를 한수 지으며 마음을 달랬다.
갱생가능 없음
밥때가 되었다고 우르르르
기둥이 썩고 대들보가 무너져도
지붕이 날라가고 바닥이 갈라져도
어둠을 먹고사는 술병처럼 우르르르
그래도 밥을 먹는다
오늘도 허겁지겁 죄를 씹고 있다
죄를 다 삼키고 입가심물 들이켜면
다시 연못에 꽃 피려나
반찬이 맛없다고 투덜투덜
배고픈 각설이 노래 부르듯이
상갓집에서 밤샌 바지뒤 주름처럼
찌그러진 식판 들고투덜투덜
작업복에서 땟국물이 흐른다
오늘도 죄를 나누고 있다
남은 죄 다 내보내고 맨손 털면
다시 연못에 배 뜨려나
비가 주구장창 내리는 봄날
건질 것 없는 빈 껍데기 속에서
사공들만 득실거리고
못 찾겠다 속죄양 만들기 급급하며
비난과 핀잔이 춤을 춘다
잘났다고 우겨대는 잡초만 무성하여
밤이 아니어도 캄캄한데
이 어둠 죽고 나면다시 해 솟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