悲慾(비욕) - 31
31. 업무분장 갈등(1)
오 이사의 노사 간 봉합 시도 노력으로 회사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무엇보다 오 이사의 요청에 의해 허 회장의 진심 어린 사과를 이끌어낸 것이 봉합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 일을 겪은 후 오 이사는 많은 직원들로부터 큰 신임을 얻었다. 또한 오 이사의 요청에 의해 부장급 이상의 임직원들은 일반 직원들보다 일찍 출근하여 업무시간에 열심히 일하는 모범을 보였다. 확대 간부 회의나 기술 회의를 비롯하여 각종 회의시 자주 다투는 모습도 자제했다.
그렇다고 과거의 상처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무소불위로 권력을 휘두르는 천태운 사장에 대한 일부 직원들의 불만은 언제든지 폭발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허방진 회장이 경영 실무에서 손을 떼고 회장실에 앉아 종일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거나 프로야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을지라도 눈치 빠른 그가 이런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천 사장에 대하여는 내부뿐만 아니고, 판매처나 자재 공급처들의 불만도 쌓여갔다.
오 이사는 노사 간 대화를 주도하여 사업장에서의 사건을 해결한 공과 구매 부문의 양호한 실적 등을 인정받아 이사에서 상무로 승진했다. 입사한 지 약 4년이 될 무렵이었다. 담당 업무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위가 이사대우일 때나 이사일 때나 그대로 구매만 총괄하는 부문장이었다.
승진 임명장을 받은 지 약 1주일이 지날 무렵 허 회장의 호출을 받았다. 평소 같으면 허 회장이 오제원 상무의 방으로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는데, 그날따라 회장실로 직접 불렀다는 것은 무엇인가 긴히 할 말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3층에 있는 회장실로 올라가니 비서실의 정수미 대리가 웃으며 맞이한다. 언제 보아도 정 대리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정 대리의 태도에는 언제나 친절함이 스며있다. 정 대리를 보는 순간, 며칠 전에 상무 승진을 축하하는 구매부문 회식 자리에서 일본 수입자재 담당인 김명혜 대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상무님! 회장님 비서인 정수미 대리가 상무님의 시를 엄청 좋아하고 있다는 것 아세요?"
"허~ 그래. 정 대리가 내 시를 좋아한다고? 고마운 일이로군. 혹시 어떤 시를 읽어보았다고 하던가?"
"잘은 모르지만, 문학잡지에 발표된 상무님 시는 거의 다 읽어본다고 하던데요. 정 대리가 엄청 감명받고 눈물까지 흘렸다는 '기울어진 나무'라는 시는 저도 읽어보았어요. 제 처지를 이야기하는 것 같아 저도 크게 감명받았답니다."
"허~ 내 졸시(拙詩)에 감명받았다니 고맙군."
그 후 김명혜 대리가 무슨 말을 할까 말까 뜸을 들이더니 어렵게 말을 꺼낸다.
"정 대리가 요즘 천 사장 때문에 엄청 괴로워하고 있는데, 좀 안 돼 보여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정 대리가 왜 천 사장 때문에 괴로워하나? 사장 비서도 아니고, 회장 비서인데."
김 대리는 너무 나갔다 싶었는지 그다음 말은 아꼈다.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하세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고, 사소한다면 사소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며칠 전 김명혜 대리와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눈 탓인지 정 대리의 밝은 미소 뒤로 감춰져 있는 그늘이 보이는 듯했다.
"정 대리! 혹시 회사 생활에서 힘든 것이 있나요? 제가 무슨 큰 도움은 되지 못하겠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도와드리도록 할게요."
"예~ 아닙니다. 회장님이 기다리시니 빨리 들어가 보시지요"
그러면서 회장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허 회장은 평소처럼 바둑을 두거나 TV로 야구경기를 보는 것이 아니고, 심각한 표정으로 응접탁자에 십여 장의 서류들을 펼쳐놓고 앉아 있었다.
"오 상무! 어서 와요. 여기 가까이 좀 앉아봐요. 내가 최근 몇 년 동안 회사의 중장기 계획이나 신상품개발 등 큰 그림만 챙겨 왔을 뿐, 인사나 자금을 비롯한 거의 모든 업무는 천 사장에게 맡겨왔는데, 이상한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이상하다니요.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자금의 흐름이 너무너무 안 맞아. 아무래도 천 사장이나 해외 법인에서 나를 속이고 있는 것 같아요."
"이 탁자 위에 있는 서류들이 그와 관련된 것인가요"
"이 자료들에 대하여는 차차 얘기하기로 하고, 오 상무에게 부탁을 좀 하려고 해요. 오 상무가 자금 및 회계업무를 좀 맡아주었으면 해요. 즉, CFO를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
천 사장이 맡고 있는 자금부문장의 업무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순간 오 상무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오 상무가 오랜 기간의 경험을 살려 자금 쪽의 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려고 하면 하 회장이나 천 사장 모두 기겁을 하곤 했는데 말이다. 특히 천 사장은 재무, 회계와 관련해서는 접근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었다.
"업무분장과 관련하여 현재 CFO를 겸하고 있는 천 사장과는 얘기를 나누신 것인가요?"
순간 허 회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