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묵향에 젖어서

헤스톤 2023. 1. 8. 07:35

(서예를 하는 나의 책상, 먹물, 파지 등으로 어지럽다)

 

 

집사람은 나의 방을 청소할 때마다 투덜거린다. 

" 이 방이 제일 지저분해. 이 걸레 좀 봐봐. 아무리 닦아도 닦아도 시커먼 것이 묻어있어~"

거의 매일 붓을 잡고 글씨를 쓰기 때문에, 매일 먹을 갈지 않아도 방 이곳저곳으로 먹물이 날아다닌다고 볼 수 있으므로 다른 곳에 비하여 더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집사람은 청소를 할 때마다 불평을 섞어 말하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 또한 스트레스가 쌓인다.

 

(먹가는 기계와 붓걸이 등이 있다)

 

그래서 수일 전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 우리 할머니 같으면 당신과 반대로 말했을 거야. 옛날에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방을 매일 청소하면서 걸레가 너무 뽀얗다면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지. '서방님~ 요즘 글공부를 너무 등한시하는 것은 아닌지요? 글씨도 별로 쓰지 않고 저렇게 붓을 팽개쳐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먹 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괴롭습니다.'라고 말이야."

"사대부의 방이 너무 깨끗하다는 것은 글씨를 쓰지 않은 것에 불과하니 당신도 생각을 고쳤으면 좋겠어~ 그리고 계속 투덜거리려거든 아예 내 방은 청소를 하지 말아 줘. 내 방은 내가 알아서 정리할 테니~"

 

그리고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말했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약 내가 나중에 내 글이 학생들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 작가가 되거나 명필로 각광받을 경우, 그 배우자가 도움을 준 것으로 기록되는 것이 좋겠는가? 아니면, 방해를 하던 사람으로 기록되는 것이 좋겠는가? 지금이나 가까운 시일 내로 내가 큰 빛을 보지는 못하겠지만, 세상 일은 모르는 거야. 늦게라도, 먼 훗날, 100년이나 200년쯤 지난 후 만약 濟南(제남)이라는 사람이 유명해지게 되는 날 당신도 그 배우자로 한 줄 차지할지도 모르잖아? 설사 크게 유명해지지 않더라도 남편이 쓰는 글이나 글씨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 배우자로 기록되는 것이 좋지 않겠어?"

그랬더니 말도 안 되는 실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며 코웃음을 친다.

하지만, 그 뒤로  집사람도 무슨 깨달음이 있었는지 예전처럼 감정 섞인 말을 내뱉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제는 내 방에서 풍기는 먹 냄새가 좋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새까만 것이 묻어나지 않을 때까지 정성스럽게 방을 닦는다. 

 

(나의 자작시 "격사"를 예서체로 쓴 작품)

 

사실 요즘 나는 서예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따라서 나의 방에는 먹 냄새가 진동한다. 특히 겨울에는 문을 잘 열어놓지 않은 탓 등으로 책장이나 벽에 더 진하게 배어있다. 서예를 하다 보면 먹물만 여기저기 튀는 것이 아니다. 종이에서 나오는 먼지도 무시할 수 없다. 

 

종이에 대한 명칭도 말이 좀 있다. 사실 붓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종이는 일반 종이와 다르다. 일반적으로 畵宣紙(화선지)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그 이유로는 ‘화선지’(畵宣紙)의 어원은 ‘화심’(畵心)이라는 종류의 ‘선지’(宣紙)로, 중국의 선주 지역에서 생산된 서화용 종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 에도시대에 수입한 중국 종이, ‘화전지’를 종이 상인들이 ‘화전지‘를 ‘화선지’로 부르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이런 이유 등으로 우리나라의 한지를 중국의 화선지로 잘못 인식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화선지는 국어사전에도 붓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쓰는 한지의 하나로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書畵(서화)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화선지에도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먼지가 많이 나지 않는 화선지를 사용하려고 할 뿐이다.

 

(해서체와 행서체로 쓴 나의 서예 작품)

 

서예에 입문한 지 약 6년 이상이 지나면서 이러저러한 사람들한테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을 보며 안타깝게 느끼는 것은 서예 자체가 충분한 밥벌이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대가라고 할지라도 서예로 인한 수입은 크지 않다. 그런 탓으로 수강생들에게 화선지도 팔고, 붓도 팔고, 먹물도 팔아서 수입을 보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대부분은 그렇지 않지만, 필방에서 파는 가격보다 너무 차이가 나게 판매하는 경우를 보면 기분이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안타깝다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사실 서예는 무엇보다 도덕을 깔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예라는 것은 남에게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수양이 앞서는 것이다.   

 

사실 먹물 좀 먹었다는 말은 지식인이라는 의미가 포함된다. 서예의 기본은 글씨를 잘 쓰는 능력도 당연 중요하지만, 먼저 인격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묵향이라는 말엔 어느 정도 인격이라는 것이 배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묵향에 젖어서 생활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오래전 "視松開想(시송개상)"이라는 나의 수필을 통해서 말했지만, 글씨를 얼마나 잘 썼느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글씨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다. 똑같은 종이와 먹을 사용해도 사람마다 각기 다른 묵향이 흐른다.  

 

 

(지난 연말 인사동 한국미술관에 전시되었던 나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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