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hink

조선 최고의 명필(5)

헤스톤 2022. 2. 2. 13:14

(왕희지의 상란첩)

 

(2) 왕희지

 

왕희지(321~379년 또는 303~361년)의 자는 일소(逸少)이다. 오랫동안 회계 산음현에서 살았으며, 관직이 우군장군(右軍將軍) 및 회계(會稽) 내사(內史)에 이르러 사람들이 ‘왕우군(王右軍)’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왕희지는 사실 동진의 고귀한 사족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벼슬하려는 마음만 있었다면 아주 높은 벼슬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왕희지는 벼슬이 싫었다. 그는 자유로운 생활이 좋았다. 나중에 절친한 사이인 양주 자사 은호(殷浩)가 하도 권하는 바람에 회계 내사라는 벼슬을 했지만, 그것도 회계라는 곳의 아름다운 산천을 구경하기 위해서이지 벼슬이 좋아서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평생 병약한 탓도 있지만, 자기만의 세계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지천명의 나이에 일찌감치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가 서예, 시, 낚시를 가지고 놀며 살았다

 

서예에 발을 디딘 것과 관계없이 아마 王羲之(왕희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명한 서예가로 누구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조맹부, 구양순, 안진경 등등 여러 사람이 있지만, 왕희지만큼 회자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서예대전에서 큰 상을 받기 위해서는 심사위원이건 누구건 어떤 연줄이 없으면 '왕희지'가 써도 안된다"는 말이 있다. 물론 이 말은 정당한 심사가 아니라는 말을 비꼬는 말이지만, 그만큼 왕희지의 이름이 높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조선 최고의 명필을 쓰면서도 그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중국 서법사에서 가장 위대한 서예가로 서예에 발을 담근 사람 중 누구라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서예의 聖者, 書聖으로 불린다. 

한, 중, 일에서는 시대마다 ‘명필’이라 불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이 사람은 어느 시대의 왕희지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 이름이 높다. 즉, 그 어떤 명필이라도 왕희지를 앞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는 생존해 있을 때부터 이미 명필로 명성을 날렸고, 후대 남조(南朝)의 제왕들은 ‘신필(神筆)’로 그를 칭송했다. 그리고 마침내 ‘글씨의 성인(聖人)’으로 추앙됨으로써 왕희지는 "서예의 神(신)"이 되었다. 

 

왕희지는 어려서부터 서예를 즐겼고일곱 살 때부터 붓글씨를 익히기 시작했다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길을 걸어갈 때나 앉아서 쉴 때나 언제나 손가락으로 붓글씨를 쓰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글자체의 구조와 필법을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면서 손가락으로 옷에다가 한 획 한 획 그려보곤 했는데 나중에는 옷이 닳아서 구멍이 났다고 한다그리고 매번 붓글씨 연습을 끝낸 후에 붓과 벼루를 집 앞에 있는 못에서 씻곤 했는데 나중에는 그 못물이 다 검어졌다고 한다. 이 외에도 왕희지가 얼마나 글씨 쓰는 노력을 했는지에 대하여는 너무 많은 일화가 있어 일일이 소개하기 벅찰 정도이다.

 

(왕희지의 난정서)

 

왕희지는 사안(謝安), 손작(孫綽) 등의 이름난 문인 40여 명과 함께 회계 산음현(절강 소흥현)의 난정에서 연회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난정에서 읊은 시 40여 수를 문인들이 엮어 『난정집(蘭亭集)』을 만들었다. 왕희지도 주흥에 겨워 이 시집에 일필휘지로 서문을 썼는데, 그 서문이 바로 난정집서(蘭亭集序)이다. 이 서문은 모두 28 324자인데 그 글 솜씨가 세상에 둘도 없어서, 지금까지 중국 서예의 최고 진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모든 서예인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그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지만, 이만 줄이고자 한다. 

물론 왕희지가 서성(書聖)으로 불린다고 해서 정말로 왕희지가 고금의 모든 서예가 중 최고라는 뜻은 아니다. 사실 예술은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가면 서열을 매기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 나는 지금 조선 최고의 명필이라는 글을 쓰고 있다.

이상 조선의 명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는 김생과 왕희지에 대한 글은 마무리하고, 맺음말로 들어가고자 한다. 

 

(집자성교서)

 

5. 맺음말(신과 인간)

 

(호랑이 해인 임인년을 맞이하여 그려본 소나무와 호랑이)

 

위에 언급한 조선시대 4명의 명필(안평대군, 양사언, 한석봉, 김정희) 중 누가 최고의 명필이냐를 구분하는 것은 우문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너무 어렵다. 70~80년대 가수 중 조용필, 남진, 나훈아 중 누가 최고의 가수냐를 묻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리고 어쩌면 어느 답변이라도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많이 회자된 이름으로 말한다면 위 4명 중에서 한석봉과 김정희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누구보다도 그들의 글씨체를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서예가들이 알다시피 한석봉의 글씨체는 '석봉체'라고 하는데, 세련되고 부드러워서 알아보기 쉽다. 반면에 김정희의 글씨체는 '추사체'라고 하는데, 삐죽빼죽하고 각이 져 있다. 특히 김정희가 쓴 '추사체'에는 남다른 예술적인 멋이 있다. 김정희는 그냥 글씨만 잘 쓴 사람이 아니라, 글씨를 예술로 승화시킨 예술가다. 그런 탓인지 많은 이들이 추사 김정희를 조선 시대 최고의 명필로 꼽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솔직히 서예뿐만 아니고, 살아온 삶이나 기타 다른 방면까지 종합하여 고려해 볼 때 추사를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 자신도 닮고 싶은 사람을 꼽으라면 추사를 맨 먼저 꼽을 것이다. 그는 분명 글씨뿐만 아니고, 그림이나 글, 금석학 등 다 방면으로 뛰어나다. 그는 천재이고, 그의 글씨 또한 神品(신품)이다.

 

하지만 모든 학문도 그렇고, 건물도 그렇듯이 기초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순전히 서예 하나만을 놓고 후대에 미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한석봉을 먼저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누구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신의 경지라고 할 수 있는 추사의 신품이 인간 작품으로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한석봉의 법품보다 못하다는 말인가라고 말이다. 분명 신의 경지는 인간의 경지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따라서 추사 선생을 크게 존경하고 닮고 싶은 것은 분명하지만, 반듯한 글씨로 기초를 만든 한석봉을 조선 최고의 명필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석봉은 어머니와의 떡 썰기 일화가 너무 유명한 탓으로 과대평가된 면이 있다고 어떤 이들은 말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그의 인지도가 높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글씨에 대한 무례라고 본다. 물론 사람에 따라 평가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개인 의견을 말하면,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은 추사이지만, 조선 최고의 명필은 한석봉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조선 4대 명필의 출신이나 그 후의 직분을 보면 왕과 직간접으로 관련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물론 한석봉도 글씨가 훌륭하여 선조의 사랑을 받았지만, 다른 이들과 비교할 때 그는 분명 흙수저 출신이다. 그런 탓인지 후대의 평가에서 다른 이들에 비해 불리한 면도 있었을 것으로 본다. 한석봉도 과거에 급제하여 큰 벼슬도 하고, 시도 잘 짓고, 그림도 잘 그리고 했다면 아마 당시 사대부나 후대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으리라고 본다.

 

서예는 분명 기능이 아니다. 서예는 예술이다. 서예가에 대한 평가는 글씨 쓰는 실력과 더불어 그 사람의 학문이나 인품, 다른 사람에게 미친 영향력 등에 의해 평가된다. 그런 면에서 추사를 더 높게 보기도 하지만, 한석봉도 온전한 자신의 글씨를 쓰고자 하는 예술적 갈망이 대단했을 것이라고 본다. 여러 기록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표준이 되는 반듯한 그의 글씨가 있기에 오늘날 많은 이들이 그의 글씨를 교과서로 삼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널리 보급된 그의 千字文(천자문)을 보면서 공부를 한다. 그런 탓으로 심지어 어떤 이는 천자문을 한석봉이 지은 것으로 알 정도이다.

 

한석봉의 글씨는 너무 평범하여 따라 쓰기 싫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천자문을 비롯하여 그가 후대에 미친 영향력은 어떤 사람보다도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석봉의 글씨체로 국가 문서의 표준서체가 확립되었으며, 현재까지 쓰고 있는 컴퓨터나 교과서에서 쓰이는 서체의 모델이 되었다. 그는 분명 평범한 서체를 쓴 것이 아니다. 평범함으로 남을 서체를 만든 서예가이다. 

 

 

 

이상 조선 최고의 명필에 대한 글을 마칩니다. 

 

(梅一生寒不賣香-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임인년에는 좋은 소식들이 많이 들리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매화와 까치를 그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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