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좋은 사람 기준

헤스톤 2020. 10. 1. 12:19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

최근 K는 이 말을 자주 한다. 솔직히 진정성 없이 장난으로 툭 던지는 말이기에 어떤 무게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지만, 찬 바람이 부는 계절로 K도 뭔가 허전하긴 한 것 같다. 즉, 어쩌면 진담이 조금 섞여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발이 넓지 못한 나에게 어떤 기대를 갖고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나 자신 아무 부담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속마음을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함부로 나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대개 여자들은 여러 조건이 많다. 우선 건강해야 하고, 돈도 좀 넉넉하게 있어야 하고, 거주할 곳으로 집도 좀 괜찮은 곳이어야 하고, 차도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는 차면 좋고, 나이도 적당해야 하고, 직업도 좋아야 하고, 지위도 상당한 수준이어야 하며, 인물도 빠지지 말아야 하는 등등, 그 조건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남자들은 대개 단순하다. 예쁘면 된다. 

 

내가 볼 때 K도 그렇다. K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혹시 아는 사람 중에 예쁜 사람 있으면 소개 좀 시켜달라는 것으로 들린다. 남자들은 대개 학력, 취미, 가족관계, 나이, 국적 등등은 상관없다. 오로지 외모 하나로 좋은 사람 여부를 구분한다.  

사실 K는 약 3년 전에 배우자를 하늘나라로 먼저 보내고 혼자 살아왔다. 그래서 친구들이 그에게 여러 차례 재혼을 권유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을 휘휘 내젓곤 했다. 그러더니 최근엔 친구들을 만나면 좋은 사람 좀 소개시켜 달라고 툭툭 던지는 것이다. 사실 그도 무슨 기대를 걸지 않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말이다.

 

K로 인해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다 보니 오래 전 IBK W지점장 시절의 일이 떠오른다.

당시 고객중 사업을 왕성하게 하다가 정리하고, 가지고 있는 부동산도 일부 처분해서 상당히 큰 금액의 예금을 보유한 VVIP가 있었다. 당연히 지점장 입장에서는 그가 지점에 오면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PB실에 근무하는 여직원과 상담 후 응접실에 있는 나에게 오더니 자기 아들의 配匹(배필)로 적당한 處子(처자)가 있으면 소개 좀 시켜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 은행에서는 PB 고객을 상대로 짝을 찾아주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다른 거 다 필요 없어. 그냥 사람만 좋으면 돼. 정말이야, 사람 하나만 좋으면 돼."

"예, 알겠습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찾아보겠습니다."

다음 날 그는 다시 지점에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난 별로 까다롭지 않아. 사람만 괜찮으면 돼. 학교는 E여대 정도만 나오면 돼. 더 이상 바라지 않아."

그 사람은 E여대를 파란 불에 횡단보도 건너는 정도의 수준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당시 "타짜"라는 영화에서 장마담(김혜수 분)이 "이거 왜 이래, 나 E대 나온 여자야"라는 대사가 떠올라 피식 웃었다. 

 

PB팀장과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던 며칠 후 그가 다시 왔다.

"난 사람만 좋으면 돼. 다른 건 별로 보지 않아. 그냥 얼굴은 복길이 정도면 돼. 크게 바라지 않아."

"복길이요. 전원일기에 나오는 복길이 말인가요?"

"그려~ 난 인물도 크게 따지지 않아. 그냥 사람만 좋으면 돼."

복길이로 나오는 탤런트의 예쁘장하고, 복스러운 모습이 떠오르며, 그의 말을 해석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만 좋으면 된다고 하더니, 도대체 이 사람에게 괜찮다는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사람만 좋으면 된다더니 "E대나 복길이"는 무엇인가.   

"아~ 예.. 그런 사람을 찾아보도록 신경 써 볼게요."

당연히 말로만 신경쓴다고 했을 뿐, 솔직히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PB실을 드나드는 고객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았고, 담당 여직원은 그 사람만 오면 송충이를 본 인상을 하곤 했다. 

 

그리고 약 일주일 정도 흘렀을 즈음 그가 다시 왔다.

"왜 소개시켜줄 만한 처자가 없는가? 전에도 말했지만, 난 까다롭지 않아. 사람만 좋으면 돼. 그래도 사돈 될 사람이 골프 정도는 쳐야겠지.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함께 필드에 나갈 수 있게."

자꾸만 무슨 조건이 붙는 것 같아 대응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최대한 정중하게 받아주면서 불편한 심기를 살짝 내비쳤다. 

"아~ 예. 부모가 재산도 어느 정도는 있었야겠죠? 여자 직업도 좀 좋아야겠고요."

나름대로 조건을 더 얹어서 건성으로 말한 것인데, 그의 다음 말은 한 수 더 나가는 것이었다..

"글쎄~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할 정도로 살면 돼. 기사를 둘 정도면 되지 않겠어. 그리고 처자 직업으로는 전문직 정도면 괜찮겠지. 난 크게 바라지 않아 그 정도면 된다고 봐. 그냥 사람만 좋으면 돼."

"아~예. 알겠습니다. 아마 시간이 오래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글쎄. 난 별로 까다롭지 않아. 사람만 좋으면 돼."

 

내가 신경쓴다고 될 일도 아니고, 잘못하면 욕만 먹을 것 같아 그냥 시간만 끌 수밖에 없었다. 다만, PB 팀장에게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며, 그래도 만나보겠다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인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른 지점으로 발령을 받아 그와의 인연은 끊어졌다. 그 후 PB팀장의 전언에 의하면 그는 타 은행으로 거래를 옮겼다는 말을 들었고, 그가 아들을 어떻게 결혼시켰는지는 알지 못한다.

 

과연 좋은 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 처음엔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면 된다고 했다가, 자꾸만 다른 조건이 붙기 시작하면 그에 맞는 좋은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좋은 사람일까? 아닐까? 좋은 사람의 일반적 기준은 거의 비슷하겠지만, 사람마다 관계에 따라 좋은 사람의 기준은 다를 것이라고 본다. 나 같은 경우도 누구에게는 좋은 사람이겠지만, 누구에게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나저나 다음에 K를 만나면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한번 물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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